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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독후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우리가 확신하는 세계에 관하여

by Hailey__ 2023. 2. 21.


다른 세계는 있지만, 그것은 이 세계 안에 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슨 은유를 뜻하는 것일까?" 생각했지만, 픽션이 아닌 과학 자서전답게 우리는 문장 그대로 그 뜻을 이해하면 된다. 말 그대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과학적인 사실만을 나열해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는 책은 아니다. 내가 읽은 과학 서적 중에는 유일하게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책이다. (물론, 완독한 과학 서적은 손에 꼽습니다만..) 책은 흥미롭고 빠르게 읽혀 나가지만,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과연 이 책은 무슨 책인가?” 이다. 과학 서적인가? 위인전? 아니면 작가의 에세이? 정말이지 조그만 단서나 의심의 조각 하나 주지 않은 채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이야기는 흘러나간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자 룰루 밀러의 삶과 미국의 유명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순차적으로 조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어느 순간 삶의 구렁텅이 속에 빠진 저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미국의 유명 어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꿋꿋이 삶을 일구어 갈 수 있었던 그의 삶의 방식이 궁금했으리라.

솔직히 말하자면, 책의 초반부에서는 ‘이 지루한 위인전은 뭐지?' 싶었고, 중반부에서는 ‘조던의 태도를 본받고자 하는 자기계발서' 구나 생각했다. 그 긍정적인 삶의 태도에 밑줄까지 쳐놓았으니 말 다 했다. 그러나, 책 중반부 이후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마치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기분이랄까. 자세한 내용은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모두가 ‘이 책은 뭐지?’ 라고 느끼면서, 동시에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이 ‘이상한’ 책에 빠져들 것이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어류는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한 과학자들이 마주한 가장 큰 벽은 인간의 직관이었다. 우리는 물고기라는 이름과 수백 년 전부터 함께 해왔기에,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물고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누구인가? 이는 자연의 진리가 아닌 그저 인간이 붙인 껍질만 남은 이름표일 뿐이다.

그렇지만, 물고기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여전히 투명한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들에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물고기를 포기한들 그게 우리에게 무슨 의미로 다가오는가? 저자 역시 동일한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이윽고 저자는 알 수 있었다. 물고기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이 얻게 되는, 삶의 패러다임을 바꾼 큰 깨달음을. 물고기도 존재하지 않는데, 세상 천지에 당연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단단한 알을 깨고 진정한 삶을 찾아 떠난다.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과학적 사실마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데 하물며 사회적 함의란 어떠할까? 특히나 우리나라에는 성공과 실패의 척도를 가르고, 정상과 비정상의 척도를 가르는 삶의 격자가 너무나도 선명하다.

요즘 가장 핫한 세계관 중 하나는 마블의 <멀티버스> 이다. 주인공은 3차원의 세계를 넘어 씨실과 날실처럼 짜인 4차원의 시공간을 넘나들며 무대를 확장시킨다. 4차원의 시공간. 그 물리학적인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단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3차원의 세계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모습은 극히 일부라는 점이다. 이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동일하게 적용해와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이, 어쩌면 커다란 구체의 작은 단면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은 후, 당장 우리 세계를 뒤바꿀 새로운 개념을 발견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수많은 질서들이, 어찌 보면 삶을 단순하게 관리하고자 만들어진 의미 없는 이름 짓기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는 ‘단어’를 늘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나의 기준에서 타인의 삶을 쉽게 재단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생명체에 높고 낮음의 사다리가 존재한다는 우생학을 신봉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놓친, 그렇지만 룰루 밀러는 깨달은 바로 그 사실이다.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책이라고 들었다. 결국 뻔한 이야기를 하는구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전혀 뻔하지 않으니, 개인적으로는 추천하는 책. 요즈음 일상에 여유가 생겨서일까, ‘삶’에 대해 반추하게 되는 시간이 많았다. 머릿속에 얽히고설킨 실뭉치들을 글에 풀어쓰지는 못하겠지만,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책이었다.

과학이라는 외피를 두른 자전적 에세이이자 철학서이자 추리소설... 사실 한 가지 이름으로 규정짓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방향이니까. 한 번 읽고 의문이 든다면 다시 한번 읽어보기를 추천합니다. 내가 그랬다..